[설교] 은혜를 깨달아야 생명을 품는다 - 막11

 

막 11:20-25 보기

     세계적으로 사막화가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유엔의 보고에 의하면 육지의 4분의 1이 사막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매년 황사가 심해지는데 그 이유는 몽골 지역의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막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비가 적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분이 증발되어 하늘에 올라가야 비구름이 형성되는데 가솔린 연료 사용 등으로 점점 따뜻한 공기가 지구에 확대되고 아울러 매연 등으로 수분 증발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하늘로 올라가는 수분의 양이 줄어듦으로 비가 적어지고 이로 인해 황량한 사막이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하늘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에서 은혜의 비가 내리지 못합니다. 감사가 하늘에 올라가야만 은혜의 비가 내리게 됩니다. 감사를 하늘로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십자가 보혈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비를 촉촉히 입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7절 말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처럼 열방 백성들을 위한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열방을 품는, 백성의 위한 기도가 있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이용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이 변질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사람들이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교회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열방을 품는 교회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시기 전 무화과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주변의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3,4월에 잎이 돋기 시작하여, 열매를 맺는 것 은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 6월경입니다. 무화과 철도 아닌 유월절 기간(3,4월)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대단히 예외적입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지금이 무화과 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잎이 무성할 철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화과는 잎이 무성하면 과일을 맺고 있어야 합니다. 잎이 무성할 철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잎이 무성했다면, 보는 이는 비록 무화과 철이 아니라 하더라도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잎이 무성하면 으레 거기에는 무화과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그 나무는 잎만 무성했지 과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말세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교회를 다닌다 하면서도 내 자아의 만족만을 위하며, 내 주머니만을 위하며, 주변은 상관없고, 하나님은 상관없고, 말씀과 명령과는 상관없이 내, 내, 내 것들만 채우려고 열심을 내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사람들과 같지는 않은지를 말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잎만 무성한-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무화과나무를 통해 보혈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고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믿음 생활을 추구하는 모습을 우리의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마 7:17말씀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한 종인지, 악한 종인지가 판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첫 사랑을 회복해야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잘 알아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모르고, 또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세상 지식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님을 알리는 방법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으시는 사랑을 받아 상대에게 똑같이 붓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상한 갈대와도 같은 존재인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두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해야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들 합니다. 친구를 잘 선택해서 사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공자는 사귀어야 할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의 기준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넓은 사람은 유익한 벗이요, 겉치레를 중시하는 사람, 아첨 잘하는 사람, 말만 앞세우고 성의가 없는 사람은 해로운 벗이다.

좋은 친구는 쓴 소리로 허물을 지적해 주고, 절망했을 때 용기와 위로를 줘야 합니다. 현란한 말과 글, 행동이 활개를 치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게 친구 되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눈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서부터 타인을 바라보는 눈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은 23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보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기도는 맺어진 어린 열매를 영글게 만듭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맺힙니다. 믿음과 기도는 헌신으로 완성됩니다.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용서는 헌신입니다. 용서는 내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존심, 계획, 감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해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맡겨놓는 것이 용서이자 헌신입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맡긴 문제뿐만 아닌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헌신적이란 말은 조건을 달지 않는 절대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헌신은 조건을 달지 않습니다.  헌신적일수록 대상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됩니다. 헌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품은 열매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한국의 미래학자 공병호 박사는

일하고, 돈 벌고, 나에게 정성들이고, 너무 자유롭지만? 사람은 언제 행복한가?
나를 위해 소비할 때도 행복하죠. 그런데 뭔가 헌신할 대상이 있을 때,
누군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큰 행복이 함께 하죠.

라고 헌신이 큰 행복을 준다고 말합니다. 헌신의 맛을 아십니까? 어떤 성도님께서 이런 간증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전 기도 중에 '십자가를 세워라'하는 감동을 주셔서 그때부터 '십자가를 세우겠습니다"라고 결심!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성씨 속에 숨은 의미가 立(세울 입)+十(열 십) = 辛(매울신) 을 깨닫고 펑펑 운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 매울신(辛)이 왜 매운 가 했더니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서 매운 거였습니다. 쓰라린 고통이 없는 사랑이란 없나 봅니다.  헌신을 하시기로 마음먹으셨다면 바짝 날이 선 검처럼 헌신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칼은 날카로워야 안 다칩니다. 날이 서지 않은 칼로 힘줘서 자르려고 하다가 손 베거나 다치는 겁니다. 그래서 프로는 나이프를 면도칼처럼 갈아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칼만 그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어중간할 때 가장 애를 먹습니다. 날 선 검처럼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는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는 기도, 날선 검 같은 헌신을 세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품고 맺고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 여러분께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이라는 서명숙 이사장의 책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벅찬 꿈을 안고 고향 제주에 내려왔지만, 사람들을 만날수록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풀이 죽어가던 시절이었다. '오 년 뒤, 십 년 뒤에나 빛을 볼 일'이라는  전문가의 조언은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비싼 비행기 타고 제주까지 걸으러 오겠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진짜 미친 짓을 벌이는 건 아닐까, 회의와 함께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오죽 했겠습니까. '제주 올레'길을 처음 낸 서명숙 이사장의 심정을 저도 잘 압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는 말이 가슴을 후빕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올레처럼 첫 길을 내야만 합니다. '미친 짓'이라는 비난도, 회의도 썩 물리치고, 아무리 외롭고 추워도. 5년, 10년은 물론 오십 년, 백 년, 천 년 뒤에 빛을 볼 새 길을 우리는 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서 이사장의 말처럼 지독한 외로움이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걷는 우리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우리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백 여 년 전 동방의 가난한 나라 조선이라는 나라에 이 마음을 품은 젊은이들이 왔습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길을 가라 말씀하십니다.

     작년 청년부에서는 월드비전과 함께 잠비아의 은조브부 존이라는 어린 아이를 섬겼습니다. 지금은 은조브부의 사정으로 콩고민주공화국의 카분다를 섬기고 있습니다.매월 2,000원의 회비를 모아 한 영혼을 섬기는 작은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땅 끝의 가난한 영혼들에게 믿음과 기도의 헌신을 열매 맺는 생명의 사역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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